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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2 

  한국에서 보낸 3주가 꿈만 같다. 나는 다시 로마로 돌아 가고, 그 곳에서 2017년을 보내게 됐다. 놓쳐 버린 과거의 수 많은 무형적 기억들을 뒤로 한 채, 애틋한 마음이 눈처럼 쌓인다. 지난 2016년이 고립된 시간도, 미지의 사유적 주체도 아니었던 것 처럼 올 한 해 또한 그러할 것임을 믿는다.

"예술적 탐구와 유희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이다. 사회적이라함은 상상 및 경험의 허공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탄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함축한다. 여기서 위안과 공감이 생긴다."

                                                                                                                 - <김호기 / '예술로 만난 사회', 부분인용>

  이는 개인적인 위안과 사회적인 공감 사이에서의 줄다리기 행위에서 예술적 실천행동이 발현된다는 의미같다.
한국에서 머무는 동안 Agnès Dherbeys 아녜스 데르비의 사진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요제프 쿠델카의 전시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인데, 그 곳에서 쿠델카의 전시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끌리는 작품들이었다. 쿠델카는 자신이 주목한 유럽 주류사회에서 배척 당한 집시들을 향해 작가의 시선으로서 바라본 집시를 개인이 아닌 하나의 독립된 객체로 다뤘다. 소련 해체 이후 유럽국수주의에서 배제된 집시들의 후천적 차별은 그들의 태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즉, 객체로부터 작가의 프레임 밖으로 이탈된 피사체에 쿠델카는 주목했다. 
그러나 아녜스의 사진은 그것과는 달랐다. '무엇이 완전히 다른 두가지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진 알리사 레스닉의 사진집<L'un l'autre>의 서문에서 밝힌 것 처럼 아녜스의 사진은 아름다움을 통한 위로와 통증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결국 아녜스는 알리사 레스닉와 동일한 목소리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서 고민했던 그녀의 심경이 나에게 와닿았다면 지나친 낭만의 교착일까.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읽을 책을 몇 권 챙겼는데 그 중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가 포함됐다. 예대재학시절 <타인의 고통>을 통해 처음 접한 작가다. 사진을 배운 적 없는 인문학자인 그녀는 오히려 당대 유명 작가나 미학자보다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현대 사진과 미학을 총론한다. 아녜스와 쿠델카의 작품을 보았을 때 느꼈던 낭만의 교착은 내가 결국 사진을 놓지 않을 것이고, 누구보다 진지하게 임하고 싶은 나의 바램의 투영이자 동일시였음에 기대어본다.

2017.2.1

 그 동안 써 온 일기를 몇 번에 걸쳐 다시 읽어 보는 습관이 있다. 지나간 시간이 만들어 낸 공백은 그 어느 때 보다 멸렬하게 끝맺음 하는 경우가 많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마음의 온점이기 때문이다. 잠시 4년 전에 쓴 일기에 시선이 머문다.

"....몇몇 사람들의 행로에 대해 생각해보노라면 오히려 시간이 아주 더디게 흐르고 있음을 상기한다. 잠들었다 깨어나면 너무나 고요해서 두려워진다. 불안 혹은 불안을 가장한 분주함을 가장 많이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은 현재 즉 미래의 미완성체이기 때문에...." 2013. 2. 25

이 무렵부터 행복은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수 많은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함을 자각 했던 것 같다. 통상적으로 단순하기만 한 이 사실을 나는 몸만 커버린 아이처럼 너무 늦은 나이에 안 것이다.

이로부터 다시 일 년 후인 2014년 일기에는 이런 글을 썼다.

"….무심코 올려다 본 천정은 커튼색에 물들어 힘 없는 연자홍빛이다. 단 한번도 본래의 색을 보여주지 못한 천정의 하얀 벽지였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관념적으로 분명, 닮아 있다. 욕심이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된 섬을 형성시켰다. 결국 오년이란 시간이 결핍의 시간이라 느낀 것은 순전히 나만의 맹목적인 보상 심리에 불과했다…." 2014.1.26

 이 글을 썼을 때 당시의 기억은 선명하다. 나는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도무지 잠을 잘 수 없고, 밤만 되면 오히려 또렷해지는 정신 탓에 내 방 천정에 새겨진 체크 무늬의 규칙적이고 구체적인 형태와 내 방 벽지에 수놓인 달리아 꽃잎의 패턴을 면밀히 관찰 할 수 있었다. 족히 10년 전부터 유행 했을 법한 촌스러운 벽지의 디자인을 보며 나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관점으로 지어진 10평 남짓 한 305호 원룸은 분명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 때의 기억을 회고할 때 마다 온전한 하나의 사적인 공간으로서 언제나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 무렵 내가 불면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책을 읽으며 밤을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 조차도 흥밋거리를 채우기 위한 독서가 아닌 최대한 빨리 잠에 빠져들게 해 줄 이른바 '지루한 책'들을 선점해서 읽기 시작했다.

 애호가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 때 내가 선별한 ‘지루한 책’ 리스트에는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 몇 권 포함돼 있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페스트>는 서점에서 구입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내 방 책꽂이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봤다. 사실 내 주변에는 자칭 카뮈의 열렬한 신봉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몇 있다. 그 사람들이 내 담벼락에 쓴 이 글을 볼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밝히건데,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고발 했던 카뮈의 작품에 대한 개인적 선호의 문제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의 간극만큼이나 형이상학적이며 또한 비현실적인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유럽 문학, 정확하게는 유럽 민중 문학 토대의 시작을 러시아 문학으로 본다. 그 중에서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좋아한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추종했던 러시아 신비주의는 분명 유효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적중했다. 혁명의 붉은 깃발 아래에서 러시아 신비주의에 도취된 레닌의 국가부흥운동은 어느정도의 성과를 올렸고, 러시아문학은 유럽 주류에 편입되고자 하는 러시아 민중의 열등감을 어느정도 잠재우는데 기여했다. 그에 비해 카뮈의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는 내가 생각하는 민중 문학의 획 안에서 이탈돼 있다. 그러한 이유로 ‘차이의 몽타주’라는 편리한 언어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이고. 


 이쯤 되니 모파상의 일화가 떠오른다. 모파상이 파리의 에펠탑을 너무나 혐오한 나머지 매일 에펠탑 바로 옆에 위한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는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모파상과 에펠탑의 일화처럼 거부할 수록 가까워지는 역설은 이와 같은 취향의 문제를 일순간 사소한 문제로 만들어 버린다. 모파상은 사후 자신의 묘비를 세울 때 에펠탑을 등지고 세워줄 것을 부탁했을 정도로 에펠탑을 혐오스러워 했다. 그러나 정작 오후 햇살에 기대어 늘어지는 ‘흉물스런 철골 구조물’의 그림자 아래에서 살아 생전 모파상의 펜은 그 어느 때 보다 바쁘게 움직이곤 했다. 그는 에펠탑이 내려다 보는 '불편한 시선'과 마주한 채 바로 그 카페에 앉아 무려 27편의 장편 소설을 썼다. 그는 정말 에펠탑을 혐오했을까? 흉물스럽기만 한 에펠탑이 자신의 심적 안식처였을 파리를 발 밑에 두고 버티고 선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어쩌면 자신의 힘으로는 저 에펠탑을 들어 올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아름다운 역설의 비화가 또 있을까? 

 비록 그 시대의 모파상이 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나름대로 그 ‘역설의 비화’를 실현하고 싶었다. 때마침 휴가 일정을 받게 됐다. 처음에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두 나라를 두고 고민을 잠시 했다. 하지만 소피아보다는 부쿠레슈티 쪽에 좀 더 마음이 기울었고, 기울어진 마음 한 켠에는 오래 전 읽었던 ‘지루한’ 카뮈의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자리하고 있었다. 불가리아와 관련된 역사나 문학, 미술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분명 언젠가 방문할 기회가 찾아 올 것이라 생각하며.

지난 12월에 여행 했던 폴란드에 이은 두 번째 동유럽 여행으로, 이번에는 루마니아 부쿠레슈티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60년 카뮈가 자동차 사고로 46년의 짧은 생을 마감 했던 도시 부쿠레슈티를 시작으로 5박 6일 간 루마니아에 머물 예정이다. 카뮈는 ‘국수주의가 팽배할 지언정 나는 영원히 루마니아를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사망했던 1960년은 공교롭게도 루마니아에서 차우세스쿠가 독재 정치를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때마침 유럽을 강타한 국수주의 열풍은 루마니아를 피의 역사로 점철시켰다.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에 자리한 루마니아의 역사는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그런데 그 등불 내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차우세스쿠의 독재정권 하에 비밀경찰의 감시 속에서 루마니아인들은 스스로에게 ‘단단한 등껍질’을 만들어 입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아마도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변신>에 나오는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풍뎅이는 작가 자신의 투영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루마니아인을 향한 카프카의 경고가 아니었을까. 그토록 단단한 신념으로 무장 했던 카뮈는 지금은 그가 사랑했던 루마니아가 아닌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 묻혀 있다. 

부쿠레슈티라는 발음을 입 안에서 굴려봤다. 부쿠레슈티라는 이름은 자신들을 폭압 했던 독재자 차우세스쿠로부터 당했던 비탄의 역사를 살아온 시민 혁명의 후손들이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또한 그들이 품고 있는 민중 정신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평론가들은 흔히 카뮈의 작품 세계를 한 단어로 ‘부조리’라고 표현한다. 카뮈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세상에는 법칙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카뮈가 사망한 이 후 그의 유해를 품은 국가와 국민은 그 누구보다도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또한 역설의 비화일까?

- 부쿠레슈티, 1월 31일.

 2017.7.31

 

 이탈리아어가 익숙해 질 무렵 오랜만에 다시 듣게된 독일어는 좀처럼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익숙해진 옷이 한 계절 건너 뛴 다음 다시 꺼내 입었을 때의 생경함처럼. 밀라노에서 스위스 국경을 넘은 것은 기억이 나는데 스위스에서 독일 국경을 넘은 것은 기억이 없었다. 깜빡 잠이 들었나 싶었다. 국경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새벽잠을 잘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어느새 독일 경찰들이 버스 안에 들어와 있었다. 언뜻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사십육분. 온 몸의 신경이 동물적인 본능으로 정신 차리라며 나를 깨웠고 미처 인지 하기 전에 손에는 이미 여권과 이탈리아 체류증이 들려 있음을 알았다. 내가 타고 온 버스는 장거리용 복층 버스였는데 내 자리는 2층 3열 이었다. 상황을 보니 이미 1층에서는 경찰이 승객들의 여권을 일일히 확인하는 작업이 한창인 듯 했고 내가 타고 있던 2층으로는 두 명, 아니 한 명이 더 올라와 세 명의 경찰이 버스 앞좌석, 중간 통로, 뒷좌석을 담당하는 모양새였다. 

“알로” 다른 말은 없었다. 나는 말없이 여권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들은 반가운 독일어였지만 이 상황은 반갑지 않군.
찰나보다 짧은 순간 시선이 스치고 여권을 빠르게 훑어본 경찰의 표정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염두에 둔 타겟은 아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처럼 간단하게 여권을 돌려주었다. “당케 슌” 물론 고맙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승객들이 여권을 돌려받으면서 무언가에 홀린듯 기계적으로 고맙다는 말을 하길래 나도 그렇게 했다. 승객들 표정을 보니 대부분 내 생각과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아랍계와 아프리카계 승객들의 여권은 따로 수거하더니 여권번호를 조회했다. 창 밖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버스는 도로 옆 “REWE”주유소에 정차해 있었는데 정면의 이정표를 보니 별다른 복잡한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심플한 직선화살표가 가리키는 글자가 눈에 익었다. “Strasbrug”. 이 쯤 되니 여기가 독일인지 프랑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아직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지는 않았으니 이 버스는 코스를 벗어난 것이 아닌 것은 확실했고 그렇다면 지금은 독일과 프랑스 국경 어딘가일 것이라고 나 혼자 결론지었다. 버스 옆에는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고 버스 기사는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별 일 없이 끝나는 통과 의례겠지. 이건 나의 생각이었고 버스기사는 피곤함과 귀찮음이 혼합된 아무 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적어도 그 때 까지는. 
 분위기가 바뀐 건 한 순간이었다. 내 바로 앞자리 그러니까 2열에는 흑인 남녀가 앉았는데 부부 사이로 보였다. 출발지 밀라노에서 함께 출발 한 것으로 보아 세네갈이나 잠비아 출신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경찰이 두 사람에게 사무적인 어조로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Reisepass” 그들이 알아 듣지 못하자 또박또박 영어로 바꿨다. “패스포트!” 끝에 ‘플리즈’라는 최소한의 존칭조차 쓰지 않는 명령조에 가까웠다. 그런데 둘 다 머뭇거리더니 여자가 작은 소리로 입을 뗐다. “가방 안에 있어요” “가방이 어딨는데요” “버스 트렁크 안에요” “꺼내 와요” 짧고 간결한 몇 마디 대화가 빠르게 오갔다. 나는 이 버스가 제 시간에 도착하긴 틀렸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지시, 아닌 명령을 받은 그들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자신들이 들고 탔던 자잘한 소지품이며 작은 손가방들을 전부 들고 내리는 것이었다. 경찰이 가방만 꺼내오면 되는데 왜 짐을 다 챙겨서 내리냐고 묻자 남자가 뭐라고 설명을 하는데 못알아들음ㅎ… 경찰이 그 때까지 줄담배를 피우고 있던 버스기사에게 버스 짐 칸을 열라고 했다.  나는 버스기사의 동작이 그렇게 빠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얼마 안있어 두 남녀의 커다란 캐리어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 놓였고 버스 안 승객들의 시선은 두 사람과 경찰들의 머리 위로 꽂혔다. 그 다음 상황은 진행이 빨랐다. 그들의 캐리어 안에는 여권이 없었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어떠한 서류도 없었으며 따라서 즉시 체포됐다. 그들의 목적지는 적어도 고속도로 한 복판 인적 없는 주유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밀입국자 같은 느낌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옷차림이 상당히 깔끔했다. 남자 몸에는 타투가 많았고 블랙진에 요즘 많이 유행하는 빨간색 조던 운동화를 신었다. 이곳 저곳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났다. 여자도 새하얀 벨벳 원피스에 헤어숍에서 꽤 시간과 비용을 들여 만든 헤어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 그 동안 전혀 긴장하는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둘은 검문 직전까지도 휴대폰으로 서로 음악을 들으며 흥얼거리다가 서로 웃고 장난치면서 나의 새벽잠을 방해하는 일등 공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신분증을 챙기지 않았을까. 노선이 정해져 있는 버스였고 자신들이 탄 버스가 국경을 두 번이나 넘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불심검문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었고. 혹시 처음부터 이탈리아에서 불법체류로 연명해오다가 적시에 독일로 밀입국을 시도했던 것일까. 애초에 여권이 없으면 버스를 탑승할 수 없는데 그들은 어떻게 버스에 탑승한건지도 의아했다. 그 어떤 가능성이든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체포된 여성, 그녀는 임산부였다는 사실이다. 경찰도 그 사실을 알고 그녀의 신병 확보에 신중했다. 그들은 경찰차에 탑승한 채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타고 있던 버스와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인간’이 이데올로기 안에서 표상과 재현 그리고 상연하는 것이 인간들의 현실적인 실존 조건들이며 개인은 한 계급의 성원으로 존재할 뿐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을 떠올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울렁였다. 

 나는 지금 카셀에 와 있다. 독일 대평원이 펼쳐져 있는 에센주의 목가적 풍경을 뒤로 한 채 공장 굴뚝으로 빠르게 변조된 스카이라인의 뒤셀도르프, 몰락한 상공업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 건설붐이 불어닥친 도르트문트를 거쳐 도착한 이 곳 카셀이 그들의 목적지였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내가 거쳐온 독일의 도시들 중에 한 곳일 터였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국가’ 개념에서 인간의 표상은 그들이 생산하는 물질적인 장치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릎을 꿇어라. 기도의 말을 묵상하라. 믿게 될 것이다.” 파스칼의 격언은 알튀세르의 이 같은 이데올로기의 생산성 테제를 명중히 함축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 파스칼의 격언에 대한 알튀세르의 변주다. 우리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종이 몇 장 짜리의 신분증. 또는 전자칩이 내장된 여권. 말을 하지 못하는 우리는 너무도 피곤할 뿐이며 거울 밖에 선 타자의 존재를 거울 안에 선 ‘나’의 현존 속에서 상상계로 치환해 버린다. 나도 그럴 수 밖에 없고. 

<카셀 도큐멘타14>를 보기 위해 일부러 방문한 이 도시에서 나를 처음 맞이해 준 것은 아르헨티나 작가 마르타 미누힌의 “책의 파르테논(Parthnon of Books)”이다.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신전의 형상을 본 뜬 이 작품은 프리데리치아눔 프리드리히 광장에 설치되어 있었다. 프리데리치아눔. 과거 나치에 의해 2천여권의 금서들이 불태워진 ‘분서갱유’의 상흔을 간직한 곳이다. 미술이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퍼포먼스는 이렇게 제시되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의 길목에서 우리와 갈라진 두 남녀의 존재는 단지 그들을 ‘증명’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한순간에 무너졌던 것처럼 책으로 쌓아 올린 책의 파르테논 또한 미술 작품의 신비주의를 일상성으로 치환함과 동시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세움과 동시에 무언가를 붕괴시키는. 이 또한 상상계로서의 치환이 아닐까? 미술이 일상으로 회귀되는 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거울’이라면 알튀세르의 거울과 라캉의 ‘상상’은 오늘 이 시대의 테제로서 진정, 현존하는가.

-7월 30일. 독일 카셀

2017. 12.19

 

 얼마 전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벌써,라는 부사가 처음,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그 다음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생일이 더 이상 기다려지지 않게 되었을 때 그 해 겨울은 유독 길었다. 모든 형태와 공간들이 변화하고 생동하는 동안 나는 줄곧 멈춰 있었나 하는 후회를 했을 때 돌아갈 곳이 막막했다. 양립할 수 없고 때론 용인할 수 없는 비뚤어진 감정을 바로 세우기란 이토록 어렵고 지루한 과정으로 침잠하는 것일까. 서로 충돌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을 때, 그 해 겨울의 첫눈은 기억에서 지워졌다.

"작가님, 소식 들었어요?"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막 나서려는데 뒤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던 유명 아이돌 가수의 사망 소식을 전해주는 그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지금 인터넷 난리에요!" 방송에서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가 언제일까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지점이 없었다. 그룹 샤이니가 데뷔한 것이 2008년이라고 하니 대학생활을 막 시작 했을 무렵이다. 그 시절의 흑역사는 지금도 자다가 일어날 정도로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아이돌을 떠올릴 만한 추억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데뷔 후 한참이 지난 다음의 일인데, 멤버들이 각자 솔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의 모 예능프로에 출연했을 때였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라디오프로의 진행자를 맡고 있었던 그는 방송 타이틀처럼 푸른 밤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추억 속의 라디오스타들을 떠올리게 해주었던 그 특집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잔잔한 추억의 파장을 일으켰고 며칠이 지났을 때엔 자연스레 잊혀졌다. 일상이 켜켜이 쌓이고, 누군가의 죽음 아니 우리 이웃의 죽음이 그 틈을 메웠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전인 2013년 12월. 성공회대 캠퍼스에 대자보가 붙었다. 해당 대학에 재학 중이던 성소수자 강은하씨는 자신이 붙인 그 대자보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안녕하지 못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첫 삽을 떴다. 동성결혼에 대한 위헌판결과 그 후속 조치로서의 차별금지법에 대한 목소리를 첫눈처럼 흰 종이 위에 한글자 한글자 새겨넣었다. 강씨의 대자보는 분열에 대한 예고였다. 곧이어 우리 사회에 팽배하게 될 불신과 반목, 분노와 혐오 그리고 자성과 비난의 소란은 어느덧 우리 앞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이 때부터 이 사람이 단순히 연예계 활동에만 전념하는 아이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청년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이 대자보를 소개했다는 이유로 일베로부터 이른바 융단폭격을 당했다. 자신의 sns계정에 강씨의 대자보를 소개한 것이 '좌파'스럽다는 이유였다. 다음 시나리오는 반전이 없었다. 남혐vs여혐 대립 프레임이 올바른 토론과 비판을 무시한 채 고삐가 풀려 날뛰었다. 그는 아이돌 멤버가 아닌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일베와 대립했다. 이 후, 대자보의 마지막 문장이었던 "안녕들하십니까"는 우리들 모두 한 번쯤 품고 있었던 찬란한 꿈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상징어가 됐다. 그는 이 대자보를 시작으로 각종 사회 이슈 현안에 대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냈다. 내가 침묵하고 있을 때 그는 세상과 소통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영영 목소리를 잃었다.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우리의 푸른 밤을 잠재웠던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안녕들하십니까. 평안한 삶을 영위하고 그 평안을 영위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사회에 마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 너와 우리. 안녕들하신가요?"

-마지막 파리,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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