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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7

매 순간순간 두 가지 선택지와 마주하고 있다. 식당 메뉴판에 적힌 글자들의 나열보다 단순해 보이는 문제들은 그러나 막상, 사람들의 관계성이 개입되는 순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 감정의 덧칠로 나의 몸을 감추는 것, 일견 비극인 것이다.

2016.2.19

인간관계에서 주고받는 마음의 무게를 측정해주는 저울이 있었으면 좋겠다.

2016.7.19

의미 있는 걸음들 사이에서 방황 하던 나의 두 발. 고작 카메라 하나의 무게가 무겁다.

/ 무의미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생애 두 번째 인도여행을 떠나고 싶다. 아무 데서나 버려질 수 있을 것 같다.

2016.7.27

​오늘도 하늘이 울음을 참았다.

2016.5.17

​왜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산다는 것.

2016.6.6

남자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고 못박는 사람 앞에서는 페미니즘의 원류를 설명하기에 앞서 특정 사상의 선택적 자유와 그 선택에 따른 권리가 특정한 '지위'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온다. 페미니즘이 여성인권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스스로 한계선을 명확히 긋고 생각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자 하면 남녀의 생물학,사회학적 차이의 양비론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엔 뭐가 맞고 틀린지조차 불분명해지는 것이다.

2016.8.14

  11일 오후 11시 10분. 내가 타고 온 인도항공 AI317편이 인디라 간디 공항 활주로에 안착했다. 도시 외곽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오직 활주로와 공항청사 건물만이 오렌지 빛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5년 전 새롭게 리모델링한 공항은 떠나는 사람들과 돌아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여행을 위한 장소로써 해방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인디라 간디 공항은 1966년부터 1977년, 이 후 1980년부터 1984년까지 모두 두 차례 인도의 총리직을 역임한 인디라 프리야다시니 간디의 이름을 붙인 인도의 허브 공항이다. 인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민족주의자 중 한 명인 자와할랄 네루의 딸이었던 그녀는 인도 전역에서 고질적인 전력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그 사실을 잠시 잊을 만큼의 조명만으로 기꺼이 이 지역을 밝히는데 부족함이 없는 이름인가보다. 그녀의 아버지 네루는 카스트 최고 계급인 브라만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족할 것이 없는 아니 오히려 매우 풍족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네루는 그러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조국에서 간디와 만난 이 후 자신의 인생 활로를 결정한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민족투쟁의 최전선에 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영국 정부에 의해 모두 아홉 차례 투옥된다. 감옥 생활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그의 딸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의 민족주의 사상을 빠르게 흡수한다. 자신의 아버지가 식민지배의 사슬을 끊기 위해 민족주의 노선을 걸으며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며 자라온 그녀는 1984년 가을, 자신이 탄압 했던 시크교도 수행원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되기까지 인도인들의 민족적 횃불 역할을 자처했다. 인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네루와 인디라 간디는 민족주의자지만 영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반정부 투쟁열사였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후대에 이르러 인디라 간디의 민족주의 노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뒤따르는 것은 그녀의 총리 재임 시절의 정치적 포지션이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현실에 얼마나 부합했는지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보다 앞서 식민국가들이 취했던 민족주의가 오늘날 폭력적인 파시즘과 동일시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반정부 혹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좌파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을 상기해 보았을 때 두 부녀는 분명 대중적인 좌파였다. 


  인디라 간디가 활동했던 당시의 민족/시대상의 굴레가 벗겨진 오늘날에도 좌파의 목소리가 수용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대중성의 함의 안에 존재해야 함은 변함이 없다. 단순한 네오키치(Neo-Kitsch)의 한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대중성의 함의는 그 속성을 결정하는 결정권이 대중에게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통치의 자유를 획득해야 한다는 전제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통치의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은 결국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무정부주의로 해석되는 아나키즘이기에 오히려 그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오히려 국가의 존속을 민족의 이름으로 결집시키기 위한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 그 자유는 무엇을 포함하며 무엇을 지향하는 것일까.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는 문장으로 요약 가능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시각으로 본 자유란,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유사한 조건의 선택지 중 개인 혹은 집단의 의사가 반영되어 특정한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자유의지'의 실천인 것이다. 사견을 덧붙이자면 이것은 하나의 사실 규명을 통한 역사의 방점이 아니라 차라리 노스탤지어에 가까운 것 같다. 과거에 대한 향수를 놓지 못하는 아나키스트는 분명 현대에 살고 있는 대중들을 향한 냉소의 도구이다. 동시에 좌파를 향한 본질적 강령일 것이다.

  역사 기록 이래 등장한 정치적 대중성을 획득한 경우는 대부분 좌파에 의한 이슈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쿠바 혁명의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체 게바라 또한 대중들이 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결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체가 애용 했던 쿠바산 시가와 애마 '포데로사' 오토바이, 검은 수염, 베레모를 쓴 마초적인 외모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여기에 부잣집 아들이자 명문 의대를 졸업한 엘리트 계급의 이미지가 덧입혀졌다. 그리고 대중들은 동화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를 향한 대중들의 시선의 종결이 사형수로서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그의 유고 사진을 지켜보는 것으로써 끝날 줄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지켜 보았을까. 모를 일이다. 자신의 신념과 대립되는 풍랑 앞에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되었건만 여전히 그의 이름 위에 쌓인 세월의 먼지 만큼이나 사상의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다. 나아가 우리가 꿈꾸는 이상주의가 현실 속에서 타자화 된다면 그 순간 사상의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 역시 정체될 것이다. 네루 부녀의 민족주의 노선 역시 이러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 안에서 육신과 정신의 요구를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비록 네루와 인디라 간디의 정치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고 같은 맥락으로 사르트르의 사상 또한 많은 한계점을 노출하게 된 계기로 작용했음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만.

  활주로로부터 전해지는 비행기 동체의 강한 진동이 현실 감각을 되살려 주었다. 인디라 간디와 체 게바라는 지워졌다.공항에서 시내로 갈 수 있는 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고 한다.새벽까지 공항 라운지에서 눈을 붙이고 날이 밝는 대로지하철 출발 시간에 맞춰 출발하기로 했다.
8년 만에 다시 밟은 땅이다. 많은 것이 변화 했을 것이다. 나는 변화 했을까. 불확실한 미래 앞에 무방비로 놓인 나 자신을 외면한 채 인도로 날아온 것에 대해 어떠한 핑계도 내세울 수 없었다. 항상 도망칠 이유를 찾았다. 미처 채워지지 않은 노트의 여백처럼 무언가로부터 얼룩이 남지 않은 상태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원인에 따른 결과는 허무했다. 나는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었다.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인도에서 보낼 6주 간의 시간 또한 단지 흘러갈 뿐이다. 이 시간에 도착하는 외국 항공편이 많지 않은지 공항은 한산했다. 가라 앉은 침묵의 공간 아래에서 파장을 일으켰을 둔탁한 도시의 소음이 숨을 죽인 채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13일 오전 10시, 뉴델리

2016.8.23

  사막에서 불어온 건조한 바람이 두터운 세월의 먼지가 쌓인 성벽 앞에서 흩어졌다. 메마른 햇빛은 도시의 오아시스를 한층 더 이국적으로 보이게 했다. 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한시라도 빨리 아늑한 숙소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할로 자팬? 꼬레아? 자이살메르 성문 앞의 혼잡한 곰파 촉 앞에서 대기 하고 있던 릭샤왈라들이 부르는 소리가 내 귀를 꼬집었다. 여행을 하면서 가장 난감한 상황 중 하나는 들리는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행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치열한 호객행위를 벌이는 그들의 집요함은 가히 정평이 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여행자들의 행선지까진 알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누군가의 가족 구성원이자 가장일 그들의 눈빛은 햇볕 만큼이나 뜨겁게 타는 듯 했고 손바닥의 굳은 살은 낙타발 같았다. 나는 샤워 후 마시는 따뜻한 짜이 한 잔이 여정에 지친 몸을 풀어주는 상상을 하며 성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깨끗한 바라나시 같았어요." 내가 자이살메르에 오기 전 앞서 이 곳에 머문 여행자에게 들은 이야기다. 깨끗한 바라나시를 상상해 보려고 했으나 곧 불가능한 시도라는 것을 깨닫고 생각을 멈추었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필시 여행자들만이 그렇게 느끼는 듯 하다-얽힌 바라나시의 골목길은 늘 그렇듯 언제나 도시가 품고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삶 속에 축적된 흔적들이 혼재 되어 있다. 여행자들은 마치 지뢰를 피하듯 길바닥 곳곳에 놓인 소나 개의 배설물을 피해 다니며 바라나시의 하늘과 강가(Ganga)의 모습에 경탄한다. 가급적 시선을 땅에 오래 머물지 않고자 하며 그들의 눈과 마음을 강물에 적시어 속세의 때를 벗고자 한다. 그 모든 것을 품으며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들이 밟고 선 땅이 존재함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는 그들이 자신들의 삶 속으로 돌아가 지난 여행의 단편을 떠올렸을 때 뿐이다. 자이살메르 성 내부로 들어오자 가파른 경사로가 나타났다.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지은 요새 답게 곳곳에 성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가파르고 급격한 커브를 이루고 있는 성의 중앙 도로는 적의 전투코끼리부대의 돌격 속도를 늦추어 성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16세기 북인도를 비롯한 인도 대륙 대부분을 점령 했던 무굴 왕조의 침략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한 라자스탄 왕조는 오늘날의 우다이푸르, 조드푸르, 자이살메르 지역을 발견, 그들의 방어 요새를 건설하고 무굴 왕조의 침략에 맞선다. 그러나 결국 적의 맹공 앞에 하나 둘 성이 함락되고 마지막까지 저항 하던 자이살메르 성마저 함락된다. 성의 함락과 함께 이 곳에서 최후의 결사 항쟁을 벌이던 라자스탄 왕조는 멸망하며 바야흐로 무굴 왕조에 의해 인도는 통일 무굴 제국이 등장한다. 무굴 제국의 통치시대는 인도 역사의 마지막 황금기로 기록되는데, 세상을 공포에 떨게 만들 줄 알았던 그들의 용맹한 전투코끼리 부대가 바다 건너 들어온 영국군의 화승총 앞에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기까지 300년이 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때 적의 공격을 막아 냈을 성벽의 영광스런 상흔은 그러나 지금은 비둘기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낙타가 묶여 있던 마구간은 여행자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기 위해 혈안이 된 기념품 상점들로 빼곡 하다. 왕과 군사들이 행진 하던 도로는 원주민들과 여행객들의 차지가 됐다.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너비의 좁은 골목길을 헤집으며 숙소를 찾았다. 성벽을 구성하고 있는 연황색 사암과 동일한 벽돌로 지은 원주민들의 집을 개조해서 만든 숙소였다. 자신을 '칼리'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주인은 꽤 오랜 기간 여행자의 발길이 끊겼던 탓인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글을 쓸 줄 모른다는 그는 리셉션 차트를 대신 작성해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이 곳 자이살메르의 문맹률은 60%에 달한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차트를 작성한 후 내가 묵을 객실로 들어갔다. 칼리는 전망 좋은 옥상이 있으니 언제든 옥상에 올라와도 좋다고 했다. 그는 내가 자이살메르 이후의 여행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나는 아직 정해진 계획은 없다고 했고 아마도 조드푸르로 간 다음 그 곳에서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로 갈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칼리는 라자스탄주 관광센터에 숙소에서 머무는 모든 여행자들의 행선을 통보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2012년 이후 위기감을 느낀 인도 관광청이 만들어낸 궁여지책이다. 2012년 버스에 타고 있던 인도 여대생을 다른 현지인들이 집단 성폭행 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한국을 포함한 여러 해외 언론이 인도를 난타했다. 신과 철학의 나라 인도는 순식간의 성폭행의 나라가 됐다. 더 이상 인도는 동양의 샹그릴라가 아니었다. 가장 시끄러웠던 건 물론 인도 현지 였다.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대통령까지 나서 진화에 나섰지만 오랫동안 곪은 상처였던 인도 내 여성들의 인권문제는 쉽게 가라 앉지 않았다. 인도에서 현지 여성들은 아버지나 형제, 남편으로부터 수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 폭력이 드러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정치심리학자 바이크 볼칸은 '선택된 트라우마'이론을 통해 억눌린 슬픔과 분노의 감정이 정체성의 핵심을 나타내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개인 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적용되며, 선택된 트라우마는 집단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회를 단합시키지만 동시에 내향적인 민족주의를 부채질 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 내가 두 차례 인도 방문을 통해 지켜본 바, 인도의 민족주의에서 유일하게 소외되는 영역이 있었으니 바로 페미니즘 영역이다. 페미니즘 실천이론은 보편성이나 특수성을 떠나 이미 존재하는 '여성'에 기반한 주장이 아니라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제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1세대 페미니즘 운동으로 알려진 60년대 페미니즘 정확하게는 "68혁명"을 기조로 한 페미니즘 운동을 제외한다면 가장 보편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전신으로 인식되고 있다. 68혁명 당시 학생과 지식인들의 입에서 나온 인권 토픽 안에는 올바른 페미니즘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이 후의 페미니즘은 다소 변질된 것 같다. 페미니즘의 본질을 추적해 들어가보면 그 기저에 깔린 의식은 공동체에 소속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본능이 내재되어 있는데 남성 중심으로 포지셔닝 된 정치, 사회 이슈는 '국가', '실증주의' , '관료제'라는 이름으로 그 의미를 명료화하고 체계화 했다. 지난 5월의 서울 강남역이 초기의 휴머니즘적 관점을 벗어나 젠더혐오의 모순을 드러낸 복합적 원리는 사회 구조의 복합성 때문에 모순은 단순하거나 일방적이지 않고 다양한 요소와 층위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중층 결정의 형태로 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보다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언론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직 한국에서는 시기상조인 듯 싶다. 

  어찌됐든 2012년 이후 인도의 관광 산업은 꾸준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며, 실제로 2011년을 기점으로 인도를 방문하는 관광객 수는 2001년에 비해 1/3 이하로 급감했다.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 중남미가 인도를 대신 하여 새로운 인기 관광지로 부상했다. 이 또한 미디어의 영향이 작용했다. 때마침 미국이 쿠바에 채운 빗장을 풀어줌과 동시에 해외 각국의 자본 유입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의해 국가 기반시설이 붕괴된 멕시코와 쿠바에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려는 미국의 눈물 겨운 노력이다. 여행자들의 방문이 궁해진 서쪽 끝 도시는 한적했다. 샤워를 마친 후 옥상에 올라가 보름달을 봤다. 자이살메르의 애칭은 ‘골든 시티’다. 사막의 모래와 그 모래로 만든 사암 건축, 그리고 저 달빛을 본 사막의 유랑민들이 붙인 이름일 테다. 그 애칭에 어울릴만큼 밝은 달빛이다. 낮의 태양이 아니라 밤에 뜬 달빛에 비친 도시가 더욱 빛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인도 여성들의 인권 투쟁이 남성들과 연대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주목할만 한 사실이다. ‘차이’는 ‘공존’을 필요로 함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칼리는 어느새 따뜻한 짜이 한 잔을 내밀었다. 이 곳 라자스탄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계피가 들어간 짜이다. 입맛에 꼭 맞았다. 수 많은 별들이 달빛에 숨었다. 달은 불빛 한 점 없는 타르 사막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안에 숨은 무언가를 찾는 듯 했다.

-8월 20일,자이살메르

2016.8.26

  낯선 도시의 풍경은 어느덧 일상의 한 켠으로 자리 잡았다. 일상의 틀을 벗어남으로서 느끼는 능동성을 도구로 삼아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가. 그리고 ‘나’는 어디에 자리하는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인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현대인들의 일상 행위의 주체는 ‘자의’가 아닌 문화권력에 의한 ‘자임’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로부터 염증을 느낀 현대인들은 일상으로부터의 탈피를 꿈꾸며 공항으로 향하는 이유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나는 그의 담백하고 깔끔한 문체 속에서 그가 사유하는 세상으로부터의 기억과 그 세상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소통이 작가로서 품어야 할 정체성의 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록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텍스트가 단어, 문장, 단락을 이루었을 때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개인적으로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경험 중 하나는 일기였다. 나와 일기의 만남은 썩 유쾌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방학기간 내내 일기를 쓰기 위해 매일 저녁 고심했던 나는 뒤죽박죽된 머리 속을 헤매며 이미 증발해 버린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나머지 거의 ’창작’하다시피 했다. 만나지도 않은 친구와의 놀이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노트 위에 빼곡히 쓰였다. 아마 선생님은 내가 그토록 활발 하지도, 그렇게 친구가 많지도 않으며, 그렇게 다양한 야외활동을 즐기는 활동적인 아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도무지 학업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처럼 행동하는 학생에게 그래도 선생님은 당신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에서의 최선을 다하셨다. 매번 내가 쓴 일기 아래 빈 여백에 빨간 모나미 볼펜으로 짧은 코멘트를 남겨 주시던 선생님은 지금도 학급생들이 고사리같은 손으로 쓴 감상문과 체험학습일지를 읽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거의 매일 일기가 아닌 소설을 쓰다시피 한 그 아이는 ‘창작’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토대로 한 다층적 함의가 바탕이 되어야 발현될 수 있는지 아주 조금, 아니 거의 알지 못한채 나이만 먹은 재미없는 청년으로 자랐다. 

  행위의 매너리즘을 경험한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라면 지난 2013년 1월 파리에서의 기억이다. 파리에 머무는 기간 내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겨울 정도로 내리는 장대비는 내가 그동안 맑은 날 내리쬐는 햇빛의 축복을 얼마나 맹신하며 살아 왔는지에 대해 새삼 반성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도시는 빗방울이 만들어낸 커튼 뒤에서 실루엣을 만들었으며, 그 실루엣은 또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며칠 째 내리는 궂은 빗방울을 뚫고 향한 곳이 있다. 표현주의와 아방가르드, 모더니즘 미술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퐁피두 센터였다. 티켓을 구입하기 위해 일렬로 늘어선 입장객의 행렬때문에 정작 입구의 위치는 간신히 짐작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백 하건대, 소장된 작품들을 감상하고 나왔을 때 나에게 새겨진 감정의 행렬은 길게 늘어진 입장객의 행렬 만큼 이나 길게 늘어질 것임을 그 순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내 안에 자리잡은 감정의 행렬은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의 형상에 가까웠다. 쏟아지는 비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미술을 공부하며 느꼈던 갈증이 해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비가 그치고 피부에 닿는 공기가 제법 더워졌다. 젖었던 옷이 마르고 공기는 맑아졌으나 내 머리 속은 그와 상반되어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혼란의 진원은 수많은 작품으로부터 받은 감정의 충돌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이면에 숨겨진 작가들의 목소리를 모두 기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아쉬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희석될 것이었다. 희석된 아쉬움은 여운으로, 그 여운은 기억으로, 그 기억은 과거의 한 순간으로 축소 되며 편린화 될 것을 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내가 증발하기 쉬운 무형의 기억보다 볼펜의 잉크를 묻혀 꾹꾹 눌러 쓴 텍스트를 좋아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핑계로 삼았다. 명확하지 않은 감정의 소요를 물질화 하는 것이 예술의 한 켠에 자리 잡은 요소 중 하나일지라도 그것이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이 매일 매일 마주하는 딜레마와 매너리즘(누군가는 정신적 자위 행위라고 하던데)을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가 되지는 못했다. 매 순간 지나쳐 버릴 순간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지자 나는 다급해졌다. 그래서 앞으로 조금씩 그러나 분명한 흔적으로서 새기고자 한다. 순간적으로 반짝였다 사라져 버릴 생각의 조각들. 그 조각들 중 하나와 다시 마주 하기로 했다. 

  3년 전 파리에서 꺼낸 조각. 이 곳, 바라나시다.

바라나시는 기도하기에 좋은 곳이라 불러도 될까? 사람들은 불에 탄 시신의 일부가 떠내려가는 갠지스 강가(Ganga)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신다. 힌두교에서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들이 섬기는 강가의 여신께 기도를 올리며 꽃을 바친다. 다음 생에서는 이런 지옥 같은 이승을 살고 싶지 않다는 갈증 같은 기도다. 곳곳에 놓여있는 사원이나 가트에서 기도에 몰두한다. 사라지지 않는 가난과 신분제의 병폐가 손톱 끝까지 밴 땅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여행자들이 버리고 간 폐품을 줍고, 걸인들은 적선 받은 돈으로 담배를 산다. 어찌 생각하면, 인도는 가장 참혹한 상황이기에 제 삶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가능한 땅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 또한 잠시 머물러 갈 뿐인 여행자의 표면적 시선과 좁은 안목에 근거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하나쯤 자신만의 특별한 감정이 투영되는 도시를 품게 된다. 헤밍웨이는 아바나에 머물며 이 곳이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라 말했다. 전혜린은 유학생활을 하던 뮌헨에서 파리의 몽마르뜨를 오버랩하고 예술가로써의 감성과 마주했다. 마크 트웨인은 한니발에서 가슴 속에 도시의 인상을 새기며 자신의 체험을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아우라로 삼았다. 히틀러는 파리가 가진 아름다움에 반해 독일 공군에 의해 유럽 본토가 초토화 되는 동안 파리를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했다. 누군가에게는 런던이, 누군가에게는 여행자들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은 남미의 작은 마을일 수도 있다. 나로서는,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 과거의 바라나시와 현재의 바라나시의 접점을 찾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자문 아니 애초에 의미가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왔다. 무의미와 마주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를 찾는 행위로부터의 안티테제이며, 기억을 간직하는 행위는 현존-감각을 실존적 해방을 도구로 삼아 사적으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기억은 불완전하며 심지어 왜곡된다. 우리는 그러한 불완전함의 결핍 면면에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간직하고자 한다. 결국 기억-추억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며 반복된 유형적 시각화와 오감의 수용을 통해 그 형상을 갖추어 나간다. 8년 전 이 도시와 마주 했던 기억은 더 이상 날 것의 기억이 아니라 가공된 추억이 되었다. 나는 이 추억을 다시 한번 꺼내어 보고 싶었다. 

  바라나시 정션역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따라붙는다. 땀이 밴 옷깃과 흐트러지는 발걸음에 맞서 부여잡는 이 손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 볼펜이다. 일부 여행자들이 곁을 맴도는 이 곳의 아이들에게 볼펜을 비롯한 조악한 악세서리를 주거나 심지어 소정의 돈을 준다는 것을 이 아이들은 알고 있다.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볼펜은 학용품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고사리 손을 거쳐간 이 볼펜은 도시 안에서 모세혈관처럼 뻗은 골목길을 따라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아이들에게 볼펜은 본래의 용도를 벗어나 잡화점에서 현금으로 맞바꾸기 위한 중간 거래품이 된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동전 몇 푼의 역할을 다한 볼펜은 다시금 먼지 자욱한 골목길에서 여행자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건전한 ‘자본의 순환’이며, 관점을 달리 하자면 가장 원초적이고 잔인한 삶의 면면이다. 아이들의 손 끝에 맺힌 갈망은 이 아이들의 손보다 더 큰 어른들의 손 위에 놓인 욕망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노란 먼지로 자욱한 골목길 곳곳을 저녁 노을이 달군다. 달아 오른 저녁 노을이 복잡한 도시의 소음을 다독인다. 내가 관념적으로 바라나시를 의식했던 것처럼 바라나시는 관념적으로 나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자리하고 있으나 반사되는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것처럼 서로의 존재를 오롯이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이처럼 특별한 도시 속 공간에 대한 단상이나 그로부터 비롯된 개인적인 시간의 향유는 결국 나 스스로의 체험과 미적 판단으로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감정의 이입은 또 다시 뜨겁게 흩어지는 빛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형상조차 형이상학적이다. 이러한 감정의 이입은 나로 하여금 바라나시를 결코 심심하지 않은 그래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도시로 간직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나는 사람들의 일상을 사랑하며, 그 일상의 아름다움과 독대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기로 했다. 바라나시의 실루엣을 간직하는 것과 나아가 그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과 마주하기 위함이다. ‘사적 경험’이 될 것이다. 

그래서, 다시 바라나시다.

-8월 25일 오후 7시, 바라나시-

2016.10.27

  사회적 합일이 대중이 원하는 방향과 이해관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님을, 이 사회는 파토스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파토스보다는 로고스가 옳은 것이 아닌가.

 옳고 그름의 판단이 언제나 역사의 변증법과 궤를 함께 한다고 가정한다면 한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헤겔과 칸트사상을 다시 한 번 답습해야 할 것이다.

2016.10.27

-체류 42일 째, 첫 번째 글

  한국에서 긍정적인 변화가 감지된다. 타국에서 한국에 관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나는 시대적 위기에 봉착한 탈근대적 시민행동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이미 시대적으로는 근대를 넘어 어엿한 탈근대의 시대를 걷고 있건만, 여전히 정치는 전근대적 행태를 벗지 못하고 있는 이러한 기형적인 상황은 탈근대적 시민행동과 전근대적 정치행방이 낳은 비명의 결과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서울의 광화문과 종로에 타오르는 촛불을 보면서 로마에 도착하기 전 잠시 모스크바에 머물렀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모스크바에 간 것은 순전히 수하물 분실로 악명 높은 아에로플로트를 선택한 결과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덕분에 모스크바에 올 수 있었으니 좋은게 좋은 것이며, 운일 뿐. 맡겨보기로 했다. 사라메티예보 공항에 도착했을 때, 모스크바는 추운 날씨 속에 안개에 쌓여 어렴풋한 형상을 띄고 있었다. 내 앞에 펼쳐진 아스라이할 정도로 흐릿한 모스크바의 풍경은 마치 영국의 인상파 화가 윌리엄 터너의 작품을 연상케 했다. 모스크바의 추운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터너가 주목 했던 영국의 찬란한 광명의 아침은 그러나 약 1세기가 지난 이 후 세워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높은 담벽을 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과의 결별을 선언한 나라이자 최근에는 유럽 연합과의 또 다른 단절로 역사상 두 번이나 독자노선을 걷는 경험을 하게 됐다. 영국이 매번 ‘일탈’을 꿈꾸고 그 것을 실현하는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가 추구하는 이상적 정치, 경제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대처 총리가 강행한 신자유주의는 어디까지나 위기에 빠진 영국의 경제 사정을 타개하기 위한 이른바 탈근대적 시도였으나 그 결과는 생산인구의 붕괴로 나타났다. 자본시장의 성장을 위해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며,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높은 세금을 부과하자 분노한 노동자와 학생,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내세운 피켓은 ‘피도 눈물도 없는’ 지도자의 폭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반세기가 지난 지금, 영국의 현실이 한국의 그것과 닮아 있는 것은 우연일까. 피도 눈물도 없었던 철의 여인과 달리 ‘피보다 진한 물’이 있다고 하는 또 다른 ‘철의 여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셀러 소설 <상실의 시대>가 한국에서 정치패러디화 되고 있는 이번 사태는 리스먼이 언급한 관계지향적 유형이 대세가 된 시대에 때늦은 근대 비판을 요구했던 정치 부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뒤늦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사담을 좀 써보면, 사람으로 살고자 하면 ‘실존’인 것이고, 마음으로 살고자 하면 ‘존재’라는 말은 곱씹어 볼 만하다 싶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가 이 말을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 하겠지만 이제와서 어쩌겠는가. 합리주의를 뒤엎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실존주의가 아니었는가. 27년을 살아오면서 거창한 인생론 따위 나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표현하자면 바닥이 닿지 않는 강물 속을 헤엄치는 느낌인데, 문득 손 끝에 닿는 것이 있다. 마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일생이 쉬운 삶은 결코 아니었다. 퇴근 후 누군가와 마주앉아 맥주잔을 맞부딪칠 때면 그 다음날 저녁은 편의점에서 3천원 짜리 냉동도시락으로 해결해야 했다. 편의점 도시락에서 비롯된 ‘혜자스럽다’라는 신조어는 한국의 청년들이 처한 ‘먹고 사는’ 문제가 사회가 아닌 청년들 스스로 눈물 어린 위로로서 극복해야함을 단적으로 드러낸 슬픈 유행어였다. 스스로를 위로해야 할 처지에 놓인 우리들은 점차 분절되었다. 현실이 냉정하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냉정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20대의 막바지를 보내는 한 청년에게 편의점 진열대는 그 차가운 냉기 만큼이나 냉정한 장소였음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결국 각자의 삶의 영역이 빌딩 숲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바다 위의 부표같았다. 다가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내 삶의 방향이 아직은 일상의 맥락 안에 머물러 있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나 보다. 자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동의 결과가 오히려 자본 아래 짓눌리도록 종용하는 딜레마로 적용되는 것에 대해 유효함을 받아들이기까지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 20세기 독일의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실존’ 두 개의 개념을 시간성의 범주 안에서 함축시켰다. 그가 <존재와 시간강독>을 통해 20세기 유럽인들의 뇌리에 자리잡고 있던 실존성이 위협받고 그것을 양분으로 삼아 자라고 있던 의구심에 주목 했을 때,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불안한 정신을 이성의 영역으로 흡수하기 위한 외로운 철학자의 고뇌가 그것이었다. 외로움에 대한 상념은 마치 모스크바에서 보았던 잿빛 안개처럼 내 마음 끝에 닿았다. 실존일까 존재일까. 한국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나는 말하고 싶다. ‘청년’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옳다고. 1960년 서울의 봄이 반세기가 지난 이 후 다시 한 번 포스트(post)-저항으로 표출되는 것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한국 사회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탈출구로 작용돼야 한다. 이번 '게이트'를 중심으로 한 농단사건에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을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기억하자. 달에 토끼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 곳엔 토끼가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 밖에 간절하지 못한 나 스스로의 무력함에 대해 내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고백으로서 힘든 청년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2016.11.9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 - 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1999년 미국 고교생 총기 난사사건을 소재로 한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 <엘리펀트>.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시종일관 인물의 뒷모습에 초점을 잡는다. 카메라는 영화 속 인물들과 완벽히 분리되어 철저히 이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마릴린 맨슨과 MP40기관단총(나치 독일의 전유물이다), 히틀러에 열광 했던 용의자들의 모습은 한 편의 서정시의 주인공처럼 보인다. 이들은 미국을 배회한다. 마치 자신들이 살고 있던 현실에 동화되지 않는 유령들처럼. 

지난 쿠바 위기 때 미-소 양국이 벌인 기싸움 결과 소련이 한 발 물러난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고르바초프가 실각했다. 이것은 추후 소련 붕괴에 결정적 원인으로 남았고. 이번 대선 결과로 인해 미국은 이번에는 내부적으로 기싸움을 벌일 것이다. 과연 미국은 내부적으로 붕괴할까. 백인과 유색인종, 남성과 여성, 내국인과 외국인,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양진영간의 다툼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전 세계 페미니즘 운동 또한 다시 주저 앉을 것이 자명해졌다.
미국은 이번 대선 결과로 다시 한 번 보이지 않는 유령과 맞닥뜨리게 됐다.

 2016.11.17

  수많은 ‘차이’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무엇이 이로운 것일까? 

어릴 적 나의 세상은 여러 가지로 당연한 것들의 집합이었다. 당연히 살아 있었고, 부모님이 계셨다. 매일 학교와 집을 왕복했다. 뉴스를 보며 정치인의 행실을 비판하고, 예능을 보며 연예인의 삶을 동경했다. 낮엔 뜨거운 태양이 우리가 살아있음을 일깨워 주었고, 밤엔 창백한 달이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야 함을 일깨워 주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언제 부터인가 내 주변에 수 많은 가능성들이 혼재하고 있으며 내가 그 중 기적적인 단 하나의 가능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 하나의 가능성이란 명확한 텍스트나 현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은연 중에 자신의 입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른바 ‘우수한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통찰력이나 제도권, 정보통일성검사 등 여러 장치들을 통해 현실로 분출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이러한 기막힌 확률에 대해 경외심을 갖는 것을 보았다. 동시에 현재는 곧 실재라는 점에서 다른 가능성들과 무한한 차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속절 없이 흘러가는 것이 시간과 계절 뿐이라면 차라리 그 위에 몸을 맡기는 편이 ‘우수한 가능성’에 대한 차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렌체 출장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레푸블리카 광장을 지나며 보았던 동물보호단체회원들의 침묵시위가 무엇이 이롭고 이롭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단초가 됐기 때문이다. 북적이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 주변은 그 누구도 접근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떠한 물리적인 분리의 기준이 없었음에도 다수의 행인들과 소수의 시위자들의 영역의 구분은 두드러져 있었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거나 제스처를 최소화 하는 등 나름대로의 시위를 존중하기 위한 의사를 보였다. 행인들과 침묵하는 시위자들의 시선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묘한 감정의 동화가 이루어지는 듯 했다. 육류 및 가공품을 소비하기 위해 행해지는 수 많은 ‘드러나지 않는’ 잔혹함은 우리 식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지구 반대편에서의 극빈곤과 자원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이미 곤충이 향후 인류의 미래를 책임질 식량으로 확정된 상태이며 육류를 가공하는데 소비되는 곡류와 물의 양은 오늘날 식량난을 겪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을 모두 구제 하고도 남을 양이다. 오늘날 인류의 식량 문제를 둘러싼 활동목적의 이면에는 이처럼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오래, 마찰 없이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발상인 것이다. 그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대신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원초적이다. 단지 먹되, 간과하지 말라는 것이다. 존 버거가 <본다는 것의 의미>에서 언급한 것처럼, 진실은 언제나 우리가 믿고자 하는 사실과의 위계질서 안에서 하위 개념으로 종속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 앞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러나 동시에 안다는 것은 얼마나 알지 못하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오늘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본 동물보호단체의 시위를 보며 생각한 ’차이’의 구분은 도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아르노강처럼 내 머릿 속에서 분명한 하나의 획을 그었다.

2016.12.1

  여배우라는 표현이 여성혐오라... 언제부터 여성이라는 기표 자체에 '여혐'이라는 기의가 포함된거냐... 분명 정도를 넘었다. 

소쉬르의 시니피앙-시니피에가 언어는 그 자체로 자의적 의식을 갖는다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한국의 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의 간극은 차라리 없애는 편이 나은 것 같다. 기표가 아니라 기의 자체가 혼재되는 양상이라면 그 결과는 전혀 뜻밖의 참극으로 끝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프랑스 여성학자 식수의 페미니즘 논쟁에 대한 그녀의 논지를 펴낸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식수는 여성이 여성으로서 곧게 서고자 한다면 여성적 리비도와 근접해야 한다고 했다. 페미니즘이라는 용어 자체가 프랑스 문학운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로 짐작하건대 식수의 주장은 2세대 페미니즘까지를 정도의 페미니즘으로 규정하고 현대의 3세대 나아가 3.5세대의 페미니즘은 재정립 될 필요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그렇다면 식수가 언급한 리비도 이론이 어떻게 페미니즘 논쟁과 결부될 수 있는가? 이유가 있다. 자신의 자아를 인지할 때 가장 중요한 상대는 타자인데, 자기 자신의 가장 직접적인 타자는 자신의 무의식이다. 내가 '나'로서 기능하는 것은 내가 '타자'라고 인식한 나 나신의 무의식인 것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여성과 남성이 서로 자신의 자아를 인지하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집단, 혹은 남성으로서의 집단으로서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나' 그리고 남성으로서의 '너' 를 인지하는 것이다.

오늘날 여성의 목소리는 여성들이 가지고 있던 무의식이 직접적으로 표출된다는 점에서 한마디로 '좋게' 보인다. 그렇다고 '옳은'것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는 못하겠다. 긍정과 부정/참과 거짓의 판단기준은 서로 핀트가 어긋난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성으로서의 '나'가 아니라 나 자신을 도리어 반대로 '여성'이라는 프레임 안에 견지하여 상대진영 즉 남성을 바라본다. 프로이트가 처음 리비도 이론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 리비도가 여성이 아닌 남성들로 구성된 기득권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사실은 주목해 볼 만 하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최초의 '여혐주의자'로 공격받았던 프로이트의 이론이 오늘날 오히려 유럽 페미니즘에서 수용되고 재해석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마지막으로 그 여배우의 '선언'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마치도록 하자. 만약 '디폴트 선언'이 올바른 페미니즘에서, 아니 애초에 페미니즘이라는 기표 자체의 씨앗이 건강하게 발아 되었다면 그 디폴트 선언은 개인의 생각으로 수용되었지 그것이 한국의 여성적 페미니즘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디폴트라는 용어를 끌어 왔다는 점. 디폴트의 수사구는 경제학에서만 통용되는 것이고, 그 용어가 사회적 언어로 재생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빌딩되어야 한다. 특정 용어가 재생산과정 없이 단순히 '차용'이나 '인용'에만 그친다면 그 용어를 차용한 개념조차 독립적인 주장의 지위를 갖지 못한다. 여성인권에 대해 그 동안 사회가 '불이행'하였으니 기본값으로 되돌리려는 의도 자체가 이미 여성적 리비도를 인정하지 않는 역설이 아닌가? 리비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남성의 폭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의 3세대 페미니즘과 초기 1세대 페미니즘이 어떤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공부해 보길 바란다. 차이와 차별은 그 자체의 의미 이상으로 언어적 사고를 규명하고, 언어적 사고는 그 사회의 인문 토대의 성질 자체를 변형시킨다. 알고리즘을 수정하듯 몇가지 조작만으로 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의 기의를 좁힐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이 오늘날의 혐오 조장문화의 얕은 수위를 보여 주는 것이다.

2016.12.4 

  폴란드에서 휴가를 보내게 됐다. 겨울 휴가는 추운 곳에서 보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고집이 나로 하여금 폴란드로 향하게 했음은 언뜻 어색한 핑계다. 공항에서 이 글의 서문을 적는다. 

  우리 각자의 목적지로 향하는 발걸음이 서로 섞이는 이 곳,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하는 장소를 서로 이어주는 경계이자 통로로서 존재하는 이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척 감미롭다.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여행의 설레임이 공항으로 향하는 발걸음 끝에 묻어 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신고 있는 워커의 발자국 소리가 오늘따라 가볍다. 공간을 채운 조명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영어와 이탤릭이 병기된 전광판과 안내 패널들이 이 장소가 서로 다른 문화권이 섞이고 있는 장소임을 드러낸다. 경계라는 단어를 연상 했을 때의 느낌은 독특하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장소로서의 불안과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는 설렘이 혼합되어 있다. 경계에서는 어딘가에 속하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본능을 잠시 내려 놓는 것이 허락된다. 커다란 경계로서 국경이 대표적일 것이고, 작은 경계로서는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곳과 단절되는 지점일 것이다. 삶이 지속되는 곳과 단절되는 곳… 생각나는 장소가 있다.

  2013년 겨울에 독일 베를린과 뮌헨을 방문했었다. 두 도시 모두 홀로코스트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해 낸 잔인한 과거사를 간직한 도시다. 베를린의 작센하우젠 수용소와 뮌헨의 다카우 수용소에서 목격한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나로 하여금 언젠가 동유럽 국가의 방문을 다짐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가슴 한 켠이 져며오는 문장이 새겨진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그 순간 삶이 단절된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서슬 퍼런 철조망을 사이에 둔 채 누군가의 삶은 영영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후 나는 폴란드와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 <쇼아(1985)>와 <카틴(2007)>을 통해 나름대로 그와 관련한 자료를 수집했다. 내가 수집한 자료를 통해 볼 수 있었던 폴란드의 이미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아픔을 간직한 나라이자, 유럽 지도에서 120여년간이나 지워지는 수모를 겪었던 국가, 소비에트 연방의 위협 아래 국가 전초의 위기를 겪었지만 끝내 폴란드라는 자치국의 지위를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굳건하게 견뎌온 국가의 이미지였다. 특히 전술한 두 편의 영화는 내가 폴란드 여행을 결정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 했음을 밝힌다. 두 영화 모두 연상기억법을 통해 되짚어보는 과거사의 서술인데, 단지 그 방법이 다소 상이할 뿐이다. <쇼아>를 통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실제 이야기를 내레이션으로 듣는 경험은 침잠의 강물 속을 걷는 것과 같고, 카틴 숲에서 울려 퍼진 총성과 총성 소리 사이의 짧은 침묵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한 파장이었다. 

  삶이 지속되고 단절되는 곳은 비단 홀로코스트 수용소 뿐만이 아닐 것이다. 감시 당한 우리의 삶은, 1940년대보다 한 층 진보되고 영악한 방법으로 우리를 통제해 왔다.지금의 한국은 그러한 국가의 폭압적인 통제 앞에 우리 스스로 ‘경계’를 허물기 위한 반항을 시작한 것이고. 굳이 ‘판옵티시즘’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쇠창살과 철조망이 아닌 보이지 않지만 보다 견고한 무형의 경계가 우리의 마음을 분절시키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희극으로, 또 한 번은 비극으로.” 칼 마르크스의 말이다. <공산당선언>을 통해 유럽에 출몰한 ‘이념’이라는 이름의 유령을 목격한 그는 적극적으로 헤겔의 사상에 러브콜을 보내 자신의 신념을 한층 더 진보시킨다. 헤겔은 자신의 논문에 이렇게 썼다. '역사와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이, 민족과 정부가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우거나, 원칙을 이끌어내고 그에 따라 행동했던 적이 없다’<역사의 철학에 관한 강연 : 서론, (1832)>. 헤겔은 알고 있었다. 국가가 역사의 흐름을 통제하고 민중의 사고를 장악하고자 하는 시도는 분명 추운 겨울을 견디는 동토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존적으로 드러내는 증거임을.

2016년의 연말을 준비하는 우리는 지금, 봄을 기대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이미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상대는 듣지 않고 있다. 결국 반복해야 한다. 물리적인 장소의 경계를 통해 우리는 서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설레임의 양가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가르는 경찰버스 ’차벽’과 경찰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가가지 못할 지언정 언제나 바라보기만 했었다. 이번에 그 시선의 끝이 향하는 곳에 국화꽃을 던졌다고 한다. 불과 100m 앞이라는 거리만큼이나 심리적인 거리감 또한 좁혀 졌을 것이다. 차디 찬 바닥에 떨어진 국화꽃의 하얀 꽃잎은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흰 빛이다. 그 하얀 국화꽃 속에 수 많은 목소리가 담겼다. 그 목소리들이 외면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물리적인 경계의 구분이 서로의 마음마저 단절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휴가 기간 동안 폴란드의 저항 정신을 되짚어 볼 생각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했던 E.H 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철저한 해석중심의 역사관이 허무주의를 파생시켰다는 비관론자들의 주장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 의미가 희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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