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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 들어찬 내 방 창가. 유일한 환기구 역할을 해주고 있는 창이기에 미처 빗물이 들어 찰 생각을 하지 못한 결과로, 닫아 두지 않고 외출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미 벽지와 바닥은 얼룩과 빗물로 흥건했다. 벽면을 타고 흘러내린 물자국이 흡사 눈물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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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하고 싶은 감정의 풍요가 입 안에서 맴돌다 종래에는 희석되어 사라진다. 의미마저 녹아버린 언어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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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인도여행에서의 인상깊었던 순간들이 떠오르는 밤. 인적이 끊긴 바라나시의 밤거리에서 내가 목도한 것은 태고적 어둠 그 자체였다. 혼자 활보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 그 날 밤 생활전선에 내몰려 심야에도 자전거로 손님을  태워야 하는 릭샤왈라를 만났다. 나는 그에게 내가 오후에 찾아간 식당이 실제로는 형편없는 맛을 선보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가이드북에는 바라나시를 대표하는 식당으로 소개되어 있는지에 대해 아주 진부하고 재미없는 주제로 한참을 설명했다. 그렇게라도 떠들지 않으면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화물차가 달려드는 4차선 고속도로를 가열차게 역주행하며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 맥그로드간즈에서 새벽녘 숙소로 돌아오기 전 일찍 개점한 잡화점을 찾았다. 티벳 청년이 운영하는 작은 구멍가게. 티벳 독립열사들이 고문을 당해 죽은, 전혀 필터링 되어 있지 않은 선혈이 낭자한 사진들이 잿빛의 벽면을 붉게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그 티벳 청년이 원주민들과 여행자들을 상대로 볼펜을 팔아 모은 목돈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달라이 라마가 여전히 티벳인들의 정신적 대부인 이상 이 청년은 붉은 사진을 떼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 청년으로부터 구입한 볼펜이 여전히 내 책상 서랍 안에 있다. 이 볼펜이 중국산이었다는 걸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 청년.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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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작업하면서 축적된 생각의 모더니즘적 기록들이 불특정한 형태를 이루며 나의 감정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그것들은 그조차 발현되지 못한 채 녹슨 기억의 침전물이 되어 무의식 속으로 침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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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흡사 그 자체로 충분히 간절한 젖은 꽃잎.

그 꽃잎이 대체물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과 같은 어색한 불협화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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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의 허상과 마주했다. 그것은 앞으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할 수도 없는 그 허상이 밟고 온 길을 떠올렸다.

 

 /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것은 계속해서 걸을 수 밖에 없다. 지나간 시간에 비례한 적당히 알맞은 모습을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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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의 시작은 아침이었다. 커튼이 햇살에 몸을 맡기며 흔들렸고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정작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는 종이 표면을 손톱으로 긁어낸 것 처럼 하얗게 뚫려 있었다.

햇살이 그녀 몸 위에서 톡톡 튀었다. 바람이 그녀의 몸을 훑을 때마다 속살이 반짝였다. 소리, 냄새, 촉각 없이 오로지 시각에만 의지해야 하는 이 꿈이 사그라들자 따뜻한 기류가 시리도록 차가워진 내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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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바다였다. 등대 옆에 서서 그 날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잠식되던 태양. 그것에 의해 분홍빛으로 물드는 하늘을 지켜보면서, 나는 입고 있던 코트를 양 팔로 포갰다. 내 품 안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그 날 따라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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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놓여있던 연필이 아래로 떨어지며 청아한 울림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허리를 굽혀 손을 뻗는 순간 책상 아래에 새겨진 문구에 시선이 꽂힌다. 그것은 누군가 까만 모나미 볼펜으로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 쓴 흔적이다. 손목의 노고가 느껴지는 듯한 필체.

"내가 당신 곁에 있기에, 우리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다."-제니퍼 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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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꾸었던 꿈. 그 배경은 교실이었다.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남자처럼 짧게 자른 숏커트에 체리브라운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가진, 익숙하지만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낯선 실루엣과 조우했다. 입술이 달짝였던 것 같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분명 성대의 떨림은 있었다. 일정한 진동수를 가진 울림의 효과는 그 실루엣에 도달하기 전에 증발했다. 동시에 내 꿈도 증발해 버렸다. 눈을 떴다. 여전히, 검다. 단단한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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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울고 싶다. 손이 무거운데 애꿋은 손톱만 짧게 깎는다. 조금은 가벼워질까 싶은데, 감각을 속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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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앉은 두 잔의 커피가 온기를 잃어가는 동안 서로의 말들이 공중에서 섞였다. 우리는 겨울이 시작된 지금, 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지만 동시에 다른 여름이었다. 관계의 미학이라는 말은 와닿지는 않지만 정작 실체를 목도하게 되면 실감하게 된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눈동자에 비추어진 한숨과 상념에 잠시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우리가 공유했던 지나간 과거가 생각 외로 나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잔잔한 추억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우리는 머리 위에 머무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감정의 층위가 다양해진 이래 그것은 가장 밝았다. 혹은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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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머리칼을 춤추게 했다. 침대 위에 몸을 뉘었을 때, 비로소 보여주기 위한 웃음의 빛이 바래졌음을 상기했다.

 

 / 하얗게 흘러내리는 기둥, 젖은 꽃잎의 불협화음, 화가의 빛, 상자 속의 투명한 뼈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 하고 싶다. 분명 그 밤은 아주 짧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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